조병옥은 흔히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야당의 거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에게 그리고 민족적 양심으로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양민학살의 책임자로 여겨지고 있다.

조병옥은 4·3 당시 최고의 물리력을 휘둘렀던 미군정 경무부장이었다. 당시 경찰은 가장 조직적으로 훈련되고 최고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총관한 사람이 바로 경무부장인 조병옥이었다. 4·3의 강경 진압 역시 조병옥의 독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야당의 거목'이라는 이미지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해방 직후 정국을 주도했던 통일운동 세력이 미군정에 의해 거세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 동안 밀월 관계를 가졌던 조병옥(한민당)과 이승만은 권력의 분배과정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은 이승만에게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야당의 길을 걷게 된 것이며 그로 인해 그는 야당의 거목으로,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극우세력 내부에서 만들어낸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자취는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 이전에 미군정 당시 경무부장으로서 수많은 양민학살을 주도했던 면모에서 찾아져야 한다. 특히 그는 제주 4·3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어서 제 9연대장 김익렬은 "조병옥 씨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에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만큼 4·3체험세대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한다.

그는 사실적 자료나 조사에 근거하지 않은 채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부쳤고, 4·3을 국제공산주의와의 연계 속에서 발발한 것으로 단정지었다. 또 도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남긴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투입시켜 강경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했다.

4·3의 도화선이 되는 3·1절 발포사건으로 인해 총파업이 일어나자 조병옥은 3월 14일 제주도에 내려와서 경찰발포에 대한 사과는커녕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내용의 협박 연설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때 기존의 3백30여명의 경찰보다 더 많은 4백20명 규모의 응원경찰을 육지부로부터 파견하면서 파업주도자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1948년 4·3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4·28평화회담이 성사되면서 평화로운 해결이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초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발하면서 그는 다시 무력 진압을 강경하게 고수하였고 이 때문에 4·3의 희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48년 5월5일 제주읍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딘 군정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최고 수뇌부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조병옥은 평화회담의 주역인 9연대장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부치면서 강경 토벌 일변도로 사태를 끌어갔다. 그로 인해 다음날 김익렬은 9연대장에서 해임되었고 '선선무 후토벌'정책도 폐기되었다. 그에 따라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집단학살 등 강경 진압이 시작되었다.

김익렬은 생전에 남긴 유고에서 "당시 제주도감찰청장이나 제주도 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 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서 한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며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 봐 진상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다고"라고 조병옥의 실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김 구

김 규 식

김 달 삼

김 익 렬

김 호 진

딘(W.F.Dean)

문 상 길

박 경 훈

박 진 경

송 요 찬

이 덕 구

이 승 만

조 병 옥

현 경 호